계명...
복음 안에서 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고 계명은 상급에 관한 조건입니다.
계명은 사람이 꼭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계명으로 받았습니다.
그가 오셔서 그 몸을 찢어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후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원받은 자들이 꼭 해야 할 사명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기에..
유대인들은 그 계명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명을 지키는데 처절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계명을 어기면 저주가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받을 상황에 처한 저들을 형벌하시기는 커녕..
오히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 긍휼은 구체적으로 성막과 제사장을 통한 속죄제사로 나타났습니다.
추상같은 법을 어긴 죄인이 형 집행을 면제받고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은 시편을 통하여 노래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복음이 오기까지 율법은 복음의 몽학선생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 역시 계명을 받았는데..
율법보다 더 무서운 것을 계명으로 받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찢어 율법의 추상같은 요구를 이루신 예수께로부터..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예수처럼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몸을 찢을 자가 있습니까?
나를 위해 그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신 예수께로부터 계명을 받았어도..
우리 중에는 그 앞에 떳떳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은혜를 입었으나 그가 주신 계명을 따라 사는 자가 없습니다.
더러 뜨거운 열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으나..
육체로 계명을 지켜보려하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계명은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써만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은 성령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지 못한 죄책감에 오늘도 몸부림을 치나..
복음이 뭔지 꿰뚫어 아는 사람들은 그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성령과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뚜렷해질 때..
비로소 인간은 사랑하게 되고 긍휼을 품게 됩니다.
성령과 내가 연합하였을 때 비로소 인간은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유의지를 갖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참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선악을 분별하여 선을 좆아 사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너무 막연하고 어렵고, 고통의 수행이 필수적인 종교가 될 뿐입니다.
계명은 육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과 충만하심에 의하여 되는 것이 계명입니다.
그게 잘 안될 그때도 여전히 그가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그분이 나를 더 자세하고 정확히 아십니다.
그런 그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신뢰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난이 오는 것은 나를 망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고난도 나에게 유익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절망하고 낙담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십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지금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못합니다.
바른길, 좋은 길, 자기와 이웃이 함께 유익한 길..
그런 아름다운 길을 지금 내가 가고 있는지..
아니면 험하고 두려운 고행의 길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게 인생입니다.(시119:67)
하나님이 성령으로 나를 인도하셔야 복입니다.
신자들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중에 고난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자만이 긍휼로 이웃의 죄악을 소리없이 덮어줍니다.
극심한 고난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율법을 들이대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계명입니다.
믿는 우리가 뛰어야 한다면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주와 복음을 위한 목적이어야 하고..
이웃을 이롭게 할 목적이어야 합니다.
이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고 주의 몸 된 교회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