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하나님!

누구세요? 무엇을 할까요?

순악질 의자왕 2022. 12. 14. 19:32

2022년 4월 3일
바울선생은 예수를 오해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회유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회유가 불가능한 자들은 감옥에 처넣어 고생시키거나 교회시키고..
그것도 여의치 않는 자들은 가차 없이 사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단의 싹을 잘라서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초자연적인 현상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햇빛보다도 밝은 빛이 나타나면서 시력을 상실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란 이름은 큰사람 이란 뜻입니다.
그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스스로 자기 이름을 ‘작은 자’란 뜻의 ‘바울’로 바꿨습니다.
어쨌든 너무 놀란 바울이 소리 지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여기서 말한 ‘주여’는 히브리 말로 ‘아도나이’입니다.
아도나이는 최고의 존경심을 나타내는 독재자, 통치자, 절대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하나님 앞에 신성을 모독하는 가당찮은 자로 여기고 있었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질문을 쏟은 내용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누구십니까?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밝은 빛 가운데 들리는 음성의 주인공을 향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에 꼭 해야 할 기도제목이 아닐까싶습니다.

신약교회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일부 기독교회와 기도원 또는 수도원에서..
그동안 저질러왔던 행태들을 한번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자면..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목사에게 자문을 구하던 교인들..
그리고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아 기도원 또는 수도원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수많은 교인들에게..
일부 잘못된 목사들, 여전도사들, 기도원 원장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내어놓던 이야기들이 무엇이었습니까?
[1주일 금식기도를 하시오! 그러면 주님이 응답을 주실 겁니다!
오늘부터 100일기도를 하세요! 또는 40일을 아침금식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이 떨어질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일부 목사, 전도사, 기도원 원장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지 아니하였습니까?
이런 사람들 치고..
영빨, 기도 빨이 강하다느니 능력의 종이라느니 하는 소문들이 무성하였습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의 지침서는 성경입니다.
그 외의 엉뚱한 것들을 차용해서 교회에 끌어들여 교리를 삼고..
진리라고 가르치는 짓은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망할 짓입니다.

기세등등하던 바울이 한순간 앞 못 보는 소경이 되어 주변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의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들어가서..
주께서 말씀하신 어떤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기간을 정해놓고..
그 어떤 사람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사흘이라는 기한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약속하신 그 사람이 언제 당도할 것인지 전혀 모르는 채..
답답한 상황에서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도 기한을 정하시지 아니하셨고..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도 기한을 정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심지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때도..
역시 우리로 하여금 기한 없이 무한정 기다리게 하고 계십니다.
하루아침에 소경이 된 바울의 심정이 되어서 깊이 묵상해 봅시다.
답답하고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나니아가 들어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손을 얹고 기도하였을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력이 전처럼 좋지 못하고 읽거나 쓰기를 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세상말로 잘나가던 인물이었으나..
다메섹 가는 길처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의 바울의 삶은..
화려하거나 윤택하거나 평안한 인생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 헐벗고 매를 맞고 굶주리고 정처가 없고..
한마디로 세상재미라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로부터 세례 받고 성령의 이끌림 받는 바울의 인생길은..
그야말로 가시밭 인생길이었습니다.
그가 왜 가시밭 인생길을 걷게 되었습니까?
그의 고백에 의하면, 기도하다가 저 셋째하늘에 끌려 올라가서..
보고들은 경험들이 결정적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고후12:1-10)

오늘날 우리의 기도의 내용들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대충 90%가 육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급하고 유치한 내용들로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고자 하는 열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육신에 필요한 것들로 기도의 분량을 채우려 들지 말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나를 위해 큰 희생을 치르신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의 기도를..
한번 깊이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