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하나님!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었습니다.

순악질 의자왕 2009. 7. 9. 08:18

천상천하에 영적존재는 셋이 있습니다.

하나님, 천사들, 사람입니다.

천사를 복수로 표기하고 사람을 단수로 표현한 이유는..

천사들은 그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자손을 두지 못하므로..

천하에 오직 자기 자신 하나만 존재하나..

사람은 하나님이 오직 하나를 지으셨고..

자기의 특성을 고스란히 유전되는 후손을 두기 때문입니다.(말2:15)

그러므로 포괄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다 형제요 자매요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행17:26)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영혼유출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사람의 육신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라 그 소리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특성을 유전 받은 육체가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으며..

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저편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하고..

그 항구적 존재로 인식되는 영혼이, 육체 소멸 후에는..

어떠한 형편과 어떤 모습으로 영생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되..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기독교회의 신앙입니다.(히9:27)
 

앞서 말했거니와 육체는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비롯되었다는 말은..

아담의 죽을 죄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다는 소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에 의해 죽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둘째아담 격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입니다.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둘째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첫째아담으로부터 사망의 영향을 받았으나..

하나님이 둘째아담 예수의 영향으로 다시 나게 하셨습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심겨졌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가 되게 하셨습니다.(고전15:50-58, 사25:8, 고후5:4)

첫째아담은 우리에게 죽음의 씨앗을 심어주었으나..

둘째아담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속에 생명이 씨로 태동하여 생명을 낳고..

행복의 절정으로 영생하는 날이 오는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때를 살면서도..

그 삶 가운데 잠깐씩 천국이 임하는 것을 시시때때로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세계에서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으나..

영적세계에서는 언제나 현재입니다.(히13:8)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우리에게 고난의 바다와 같은 육신의 때를 겪게 하신 것은..

언제나 현재인 영적세계의 그 좋은 것을 사모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늦다싶은 그때에 좋은 날이 홀연히 이릅니다.

이 고달픈 물질세계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하신 후..

행복이 끊임없이 샘솟는 영적세계를 사모하게 하시는 까닭은..

그 좋은 것들을 노력의 대가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주시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자기의 열정으로 되는 줄로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기열심 또는 억지로 하는 것은 종교생활일 뿐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신적 감동에 의해..

저절로 되는 것이 신앙생활인데도..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해서라도 목표한 것을 이루려고 하는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결과를 앞에 놓고..

[내가 이렇게 이루었다]며 흐뭇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종교생활을 햇던 자들은..

그날에 그분 앞에 가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것이 그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꼭 그런 줄로 알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하였는데..

결과가 엉뚱하게 나타났기에..

이를 뿌득뿌득 갈며 억울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을 홀로 받으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영예를 사람에게 빼앗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시되..

오직 당신의 권세와 능력을 덧입히시어 일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노력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에 따라 이루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세계각지에 있는 유명한 종교지도자들과..

수행과 고행을 통하여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인들도..

단 한사람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노력은 가상하나 헛된 노력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그들도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치고..

육신의 요구를 제어하여..

온전하고 흠이 없는 인생을 살기를 소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라도..

연약한 육신을 자기의 원하는 대로 콘트롤하여..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온전히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통하여 분명히 자유가 선물로 안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남용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것을 방종이라고 합니다.

비판적으로 보면 틀림없이 방종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육신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측은히 여길 수밖에 없는 부분일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이 긍휼을 입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땅에서도 저주받다 죽어가고..

죽음 저편에서도 영원한 저주가 기다리는 운명의 존재들이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의 그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다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른 사슴으로서의 자세입니다.

그것만 있다면..

그 나머지의 것들에 대하여서는 호통쳐야할 부분은 존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