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하나님!

성령을 근심케 말자..

순악질 의자왕 2019. 9. 16. 21:24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도의 도덕성을 기대합니다.

목사에게는 그에 더해서..

엄격한 자기 통제를 실현한 자로 우뚝 서 있기를 요구합니다.

그에 부응하여 어떤 목사들은 그것을 실현해 보려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세처럼 예수처럼 40일 금식을 감행하기도 하고..

그것도 잘 안되면 비슷하게라도 해보려고 물만 먹으면서 버티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하루에 한 끼니씩만 먹고..

40일 기도니 100일기도니 하면서 자기의 인내를 실험하고..

고행으로 자기의 육체가 왕 노릇 하려는 욕구를 이겨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의도한 설정대로 어느 정도 되어져 가고 있으면..

그때부터는 교인들에게 따라오라고 합니다.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설교를 할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듣는 교인들에게는 은연중의 강요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라하는 교인들은 큼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로 여깁니다.

자기통제가 잘 안 되는 교인들은 그때부터 목사를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을 치며..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한탄합니다.

그리고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

그것이 회개의 모습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무능하고 연약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자기의 노력으로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담당하신 몫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도 하고..

분노가 치솟아 고성과 욕설이 오가고..

사기 질과 도둑질이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적에 육체를 지으시고 영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때를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연약함을 겪게 하시고..

육체가 왕 노릇 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존재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을 따라 살려는 욕구에 비해..

육신을 따라 살려는 욕구가 강함에 절망하고..

비로소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호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유다사람들마저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황할 적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많이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들의 외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마다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대하여..

하소연이라도 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제정하시고 죄인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웃들에 대하여 진실함을 나타내며..

서로 화평과 공평의 도를 생활 속에서 펼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4:25)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함과 무능함과 못난 모습이 나타나도 괜찮습니다.

구원과 생명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육신의 때를 살아가는 동안..

꼭 있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은 장성한 분량의 신앙생활태도입니다.

장성한 분량의 신앙생활태도가 구원과 영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혼의 그날에 성도들이 받을 상에 관한 문제입니다.

육신의 때를 사는 동안 이웃을 향하여..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옷 입고 용서하고..

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품고 대하며..

사람의 가르침을 기준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그의 교양과 훈계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한양하며..

모든 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3:12-17)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받을 일이고 귀한 일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과 저주를 퍼부을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살지 못한 자들에게도 구원은 있습니다.

다만 그날에 받을 상이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그 자손들을 애굽에 보내어 거기서 큰 민족으로 번성하고..

거기에서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게 하시려고..

요셉을 애굽에 먼저 그곳에 보내셔서 고난 속에서 큰 인물로 자라게 하셨듯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맏아들을 먼저 이 땅에 보내셨고..

그로 하여금 큰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전에 행하던 대로 어리석은 행동이나 불순종이나 각색 정욕을 행하거나..

악독과 투기와 가증스러운 생활과..

극도의 미움을 품고 살았던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그가 피를 흘려 이 모든 악행을 씻어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기억하면서..

생각을 고쳐먹고 선한 일을 하려고 힘쓰는 자들로..

하나님 눈에 날마다 발견되기를 소원하는 성도들로..

재창조되었으면 좋겠습니다.(3:1-8)

구원은 선물이고 헌신은 상급입니다.

그날의 상급을 위하여 우리 모두 이렇게 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