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없는 믿음은..
2024년 2월 18일 주일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의 말은 기적을 불러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능력은 또한 믿음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말하고 행동으로 나아갈 때..
역사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던 역사도 마리아의 믿음의 말과..
그 말을 따라 그대로 실행하였던 하인들에 의해서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믿음으로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치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될 만큼 불가능한 형편이기에..
현실적으로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의심도 없이 이루어지기까지..
장장 20여 년을 기다렸던 이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탄생한 상속자 이삭의 후계가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삼일 길을 걸으면서도 아들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결심이 무너지지 않았으며..
아들을 번제로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19)
이 세상은 온갖 거짓 것들이 진실인양 포장되어 난무합니다.
그런 것들을 가짜뉴스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은 가짜뉴스가 아닙니다. 진짜뉴스입니다.
그가 선언하신 말씀은 생명입니다.
촉촉하게 젖은 땅이 씨앗을 받아들여 품으면 얼마 후에는 새싹이 솟아오릅니다.
씨의 속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 생명의 말씀이 생각으로 피어오르고 그것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온 후에는..
살아서 역사함으로 머지않아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신 큰일을 믿는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싹을 움트게 합니다.
그 복음의 바탕위에서 교회생활이 이루어지고..
모든 좋은 것들이 교회생활에서 비롯됩니다.
교회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교회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생활은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좋은 것들이 수시로 생기는 원동력입니다.
믿음생활은 가만히 있어도 복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 복을 많이 누린 사람들이 영혼의 그날에도..
칭찬과 함께 크고 작은 상들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때는 믿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믿지 않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믿음이 확고한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품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종종 발견됩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일신상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불신의 현상이 화산폭발과 같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중대한 결정의 기로에 섰을 때의 자세가..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하게 가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론에 더하여 그것이 일상생활에 행위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에 그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노련한 외줄타기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높이 공중에 설치된 외줄에 올라서서 기다란 쇠막대기로 중심을 잡으며..
반대편까지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모습은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청중들은 그의 노련함에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곡예사는 청중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을 등에 업고도 이 외줄을 건널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청중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모든 관중들이 곡예사의 실력이면, 틀림없이 한 사람을 등에 업고도..
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외줄을 넉넉히 건너게 될 것을 믿는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곡예사가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당장 내 등에 업힐 사람은 나서시오!]..
[저 건너편에 도착 한 후에는 백만 원을 주겠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단 한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잠시의 침묵 끝에 곡예사의 친구하나가 나섰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나선 것입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관중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고함을 지르며 요란하게 떠들어댔지만..
결정정인 순간 저들의 믿음은 가짜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만한 믿음인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적과 표적의 현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온전해지며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기적의 현장의 주인공이 있었고 구경꾼들이 있었습니다.
구경꾼들은 경이로움과 놀라움으로 탄성을 지르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라는 시위대의 일원이 되어 고함지르는 자들로 돌변하였습니다.
구경꾼들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현장의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경꾼들의 대열에 서있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