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하나님!

부흥하는 교회..

순악질 의자왕 2022. 8. 2. 14:35

교회부흥은 헌신하는 사람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부흥을 위해서 헌신합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바로알고 그로 말미암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진실함과 성실함과 정직함과 충성스러움이 있어야..

비로소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과 성실과 정직과 충성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이론에 머물지 아니하고..

현실적으로 삶에 직결된 흔적을 남겨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곁에서 그것을 목도한 사람들마다 놀라워합니다.

수십 년을 교회에 출입하면서도 놀라운 일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였거나..

최소한 주변에서 목도한 일도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각한 병에 걸려있다는 강력한 반증일 수 있습니다.

어떤 질병이든지 원인을 빨리 찾아야 쉽게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는..

인생문제에 있어서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고 빨리 찾을 수 있는 치유센터와 같습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본래의 뜻을..

정확히 해석하여 전달해 주는 자가 설교자입니다.

설교자가 성경말씀을 기준삼아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원 뜻을 똑바로 파악하고 가르칠 때..

성도들은 생활 속에서 수시로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끔..

지름길을 조명해 주는 지침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갈등과 다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준을 높이 세워놓고..

말씀에 자기의 의견이 저촉되고 있지는 않는가를 살펴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부흥을 위해서는..

사적인 시기와 질투를 내버려야 하고 자존심도 내버려야 합니다.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교회부흥이라는 명제아래..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그 희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안쓰럽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그런 사람을 위로 안하시고 누구를 위로하시겠습니까?

성령께서 위로를 어떻게 하십니까?

전도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재물에 대한 손해도 감수하고..

속상한 일들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낳겠다는 열정하나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려는 몸부림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성령의 위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헌신적 생각을 가진 성도의 인내의 모습 때문에 교회가 평안한 것입니다.

교회가 평안하여야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양적으로도 부흥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하나둘씩 생겨날 때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또한 먼저 믿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나타내어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교회에 먼저 등록하고 오래 출입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부분만 내세우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출입연조는 오래되었으나..

절대순종의 모습도 없고 크게 헌신하는 모습도 없으며..

기득권을 침해당하지나 않는지 눈이 시뻘개진 모습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며..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심각한 중병이 든 강력한 반증일 수 있습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이 일평생 평온하고 일관되게 진행되는 일은 없습니다.

크고 작은 희로애락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하나의 물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면 큰 믿음이 아닙니다.

작은 물결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한다면..

그것을 견고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바울선생 또한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서..

자기 주관적인 생각을 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인생의 길이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만난 것이 아닙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만났습니다.

강렬한 그 어떤 빛에 시력을 잃어버리고 충격에 빠져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사흘의 고통을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응답은 일방적이지 않고 반드시 양쪽에 동일하게 응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여..

오히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기까지는..

이와 같이 큰 고통의 강이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예수를 반대하던 시절에는 그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자가 되자..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맹세하는 무리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예수 믿는 길이 왜 이렇게 험난합니까?

주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왜 이렇게 위험합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왜 이렇게 위태위태합니까?

그래서 육신의 때가 끝나고 영혼의 때가 도래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크고 웅장하고 분에 넘치는 보상의 날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의 목적이 무엇이고 영적생활이 어떤 생활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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