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의 첫 열매이십니다.
그가 육신의 때에 지독한 고생을 하신 것을 볼 때..
우리가 육신의 때에 고생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장차 닥쳐올 끔찍한 고통으로..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림을 느끼신 것을 볼 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이런저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부지불식간에 생기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기를 위하여 변명하지 않고 침묵하신 것을 볼 때..
우리도 또한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때로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한세상 살다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극심한 고통 중에 세상을 하직할 때..
어떠한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예비 된 소망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가 죽음을 이기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부활체를 입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바라보면서..
그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 우리도 그와 똑같은 신령한 몸을 입고..
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서..
행복한 중에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을 상기해 봅니다. 그는 어부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어로작업을 하였으나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물을 씻고 있는 그에게 예수께서 배를 빌려달라고 하시고..
배에 타고 앉아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눅5:1-7)
베드로가 주님과 첫 대면에서 물고기 잡이 대박을 경험한 후..
기겁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라나섰고..
3년 후에 부활하신 주를 만난 후..
두 번째 물고기 잡이 대박을 또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죽기 전에 만난 상황이고..
두 번째는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 만난 상황입니다.
첫 번째는 그물이 찢어졌으나 두 번째는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제자로 부르심에 앞서 벌어진 상황이고..
두 번째는 주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소문을 들었을 뿐..
직접 확인하지 못한 상황입니다.(요21:25)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비슷한 것은..
노력한 대가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참담하고 허탈한 결과입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참담한 것은..
3년에 걸쳐 헌신하였는데도 모든 기대가 희망이 허무하게 날아간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이..
일상생활 중에 원치 않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쳐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 의지하고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개인적인 어떤 기대와 희망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믿음생활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천국복음전파에 요긴하게 쓰실 그릇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주시고 일으켜 세우시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성령을 사모하여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천국복음에 사역자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절망스러운 상황은..
그것이 결말이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고 상승할 기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이것을 종종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밥 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치와 보람이 없으면 그 인생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찍 죽는다고 저주받은 것이 아닙니다.
늙어서 육신의 여러 가지 기능이 연약해지고 노쇠해서 사는 재미가 없다고..
탄식할 일도 아닙니다.
사도들 중에는 예수복음을 전하다가 젊어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도 요한은 9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그러나 9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사는 것이 고통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영의 눈이 열려서 장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예수 믿는 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이 수반될 것입니다.
왜 고통이 극심합니까?
믿음을 지키려니 극심한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아야합니다.
각자 주께서 맡기신 사명에 따라 주와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세상이 휘청거리며 돌아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떼어 떨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과 멀어지면 원수마귀의 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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