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은 일방적인 것이기에 안타까운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행복한 것이기도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손녀들을 향한 사랑이 대부분 그와 같습니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처럼..
애지중지 기른 자녀들도 어렸을 때에는 엄마아빠 없이는 못산다고 했어도..
다 자라서 성인이 되고 각각 짝을 찾아 부모의 품을 떠나고 나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부모들도 더러 있습니다.
손자손녀가 버릇없이 굴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함부로 야단치지도 못하는 것은..
그나마 이 짝사랑이 자기에게서 멀어질까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짝사랑이나 손자손녀들을 향한 조부모의 짝사랑이..
마냥 서글프지만은 않은 것은..
그게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체를 어렴풋이 나타내는 그림자인 때문입니다.
가족 간의 내리사랑과는 또 다른 성격의 이성간의 사랑이 짝사랑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싹트는 짝사랑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돌진하는 안타까운 사랑입니다.
그것은 더러 비극으로 결말이 나타나기도 하고..
더러는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짝사랑도 역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짝사랑은 어찌 보면 서글프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합니다.
가장 극적이고 안타깝고 눈물겹고 진한 통증이 물씬물씬 배어나오는 미친(?) 짝사랑의 이야기는..
아마도 호세아서에 기록된 내용일 것입니다.
머저리 같은 호세아가 걸레 같은 여자에게 장가들더니..
바람나서 집나가기를 물마시듯 하고 남편의 것을 가져다가 정부에게 갖다 바치는 그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통이 터지게 하고..
그런 음란한 여자를 위하여 재산을 팔아 먼 길을 여행하는 호세아가 너무나도 비참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치를 떨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리석은 호세아의 초라한 몰골의 일방적인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은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바보 같은 짝사랑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들도 때때로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되어서 가슴앓이를 합니다.
예수가 피 흘려서 만들어 놓으신 십자가의 길만 따라서 육신의 때를 살아야할 교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비춰주시는 대로 그 말씀을 등불삼아 육신의 때를 살아가야 할 교인들이..
하나님의 그 짝사랑의 편지들을 찢어버리고 각기 제 길로 갈 때에..
목사들은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서 냉가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러 하나님의 짝사랑에 부응하여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불일 듯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열어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목사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짝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빈천의 나락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항상 젖어있었고..
긍휼의 가슴으로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품을 간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손들에게 가여운 사랑을 앓고 계신 하나님을 뵈온 듯이..
사회적 약자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위로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통사람들과 같이 연약한 자들이었으나..
육신의 때를 사는 동안..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이고 무엇이 선한 삶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웃들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시느라고 외롭고 쓸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렸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부응하여 자리를 박차고 떨쳐나선 헌신은..
상급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심정과 그분을 향한 헌신의 뚜렷한 자세는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신의 때를 사는 동안 모든 것이 풍족하고 윤택하여..
가진 것에 비해 부요의 기름이 그 생활 속에서 줄줄 흐릅니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병원의 수요예배를 마치고 모처럼 작은 피자파티가 있었습니다.
그 피자파티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참석자가 ‘5년 만에 피자 맛을 보았다’며 너무도 즐겁고 아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누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짝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우시게 하는 일이 연보를 통한 나눔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짝사랑의 안타까움에서 그만 벗어나게 하는 일이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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