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하나님!

하라 하지마라..

순악질 의자왕 2009. 2. 23. 22:06

하나님은 사람에게 육신의 때를 살면서 꼭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라]와 [하지마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대로 살기만 하면..

그 인생에 나쁜 일은 없고 좋은 일만 생깁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에는 힘들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는 너무나도 쉽게 다가가서 일을 저질러버립니다.

그래서 그게 죽을죄가 되었고..

죄의 결과로 저주가 찾아왔습니다.

아담이 죽을죄를 저질러서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창세기에 말씀하심으로서..

좋은 것은 위에서 내려오고..

나쁜 것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좋은 것은 모두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땅에서 나는 것인 줄로 잘못알고 땅만 바라보고 사나..

사실은 좋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을 쳐다봐야만 복을 받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면 뭔가 잘 안되고..

막히고 묶이고 헝클어지고 답답하고 평안함이 없어서..

사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처절하게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뭔가 일이 꼬이고 잘 안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가지고 와서 해결을 받았습니다.

죄가 그 삶에 침투하여 저주를 불러들이고..

고난을 만나 허덕거리다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짐승을 잡아 성전으로 끌고 가서 자기대신 죽이고..

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뿌리며..

그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개운한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죄인의 뒤통수에 대고..

제사장은 은 나팔을 불어 축하해 주었으며..

그 후로부터 그 사람의 삶의 현장은 좋은 일들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나설 때..

마음이 날아갈듯이 개운하면..

그는 예배에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고 꺼림칙하다면..

그는 예배에 실패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사람은 평상시의 그 생활에 좋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성공한 사람은..

그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좋은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좋은 일들이 저절로 생기고 일마다 술술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안보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복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십니다.

무능한 죄인들임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완전한 모습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창17:1)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습이 사람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죄를 저지름으로써 완전한 길에서 벗어나게 되어 저주를 불러들였기에..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죄를 멸하셨습니다.

예수의 그 보배로운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린 모습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는 말씀 앞에 굴복당하고 육신의 요구를 억제하고..

영의 요구에 따라..

살리는 일에 쓰임 받을 그릇으로 세워져가는 사람들이 많이 길러져야합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왜 잡음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과 소견을 따라 말하기를 서슴지 않고..

사람들의 숫자에 따라 지도자들이 그 말에 굴복당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말씀 앞에 굴복당해야 교회에 좋은 일이 생깁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말씀 앞에 굴복당하고..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당하는 훈련을 시켜야합니다.

자녀들의 형편과 처지와 그들의 생각에서 나온 말에 부모가 굴복당하면..

결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장차 이스라엘 왕이 이새의 집에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새의 아들들이 다 모였으나 다윗은 들에 양들과 함께 있었던 것만 보더라도..

다윗이 그 아비 이새의 집안에서의 지위가 어떠했었는지..

넉넉히 짐작할수 있는 일입니다.(삼하16:1-13)

그런 그를 하나님이 왜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여 왕의 사위가 되게 하고..

나중에는 왕이 되게 하셨겠습니까?

사울보다도 오히려 크고 중한 죄를 더 범한 그였지만..

그에게는 사울에게는 없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형편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의 왕이 되어 사울의 잔당들과 힘겨루기를 할때..

씨 다른 누나 스루야가 낳은 세 아들들..

즉,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은 정권을 잡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에 큰 힘이 되었었기에..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그는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자칫 허수아비 왕이 될까 노심초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다윗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시101:18)

왕 노릇을 하면서..

왕 가까이에서 국가를 경영하는 왕을 도와..

국사를 보좌하는 중신들을 등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들]을 제일로 쳐서 선발하기로 결정한 일입니다.(시101:6)

자기가 왕이었지만..

자기 위에 보이지 않으나 더 큰 왕이 있음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입니다.

연약하여 저지르는 죄의 대가를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을 요구하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