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하나님!

내 삶이 고통스럽다고 하나님이 안계신가요?

순악질 의자왕 2006. 5. 1. 07:34

야곱이..

이를 갈고 있는 에서의 낯을 피하여..

21년간의 도피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고 재물도 풍부하여 가문을 이루었으나..

처가인 밧단아람 거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장인이 사위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사위가 가진것을 어떻게든 빼앗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향과 객지사이를 오가면서 안전한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오직 바라볼 곳은 위에 계신 하나님뿐임을 느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에서의 위협앞에서..

자기의 피땀 어린 생명과 재산을 지킬 힘이..

자신에게는 전혀 없음을 깨닫고 두려움에 떨며..

다급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몸부림을 치며 기도하다보니..

몸이 상하여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고..

마침내 초라한 몰골로 에서와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초라하고 핼쓱한 아우의 몰골을 발견한 순간..

에서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게 되고..

형제는 눈물로 부둥켜안고 화해하게 됩니다.

야곱은..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건강보다 더 소중한 형제를 얻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복을 약속받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창32:1-32) 

고생스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누가 야곱에게 저주받았다고 말하겠습니까?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나..

[야곱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그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할지..

그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사람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인간은 땅에 거하는 동안 잘못을 저지르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꾸중들을까 두려워하고..

꾸중이 무서워서 죄를 감추려 하고..

꾸중이 두려워 스스로 숨어버리려고 도피처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꾸중하지 않으시고..

누추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뻔히 아시면서도..

긍휼을 베푸셔서 그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원수마귀의 참소를 없애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죄를 짓고 면목이 없어서 기도를 안 합니다.

응답은 커녕 야단이나 맞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없는 것은..

믿고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하기 때문이라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혜를 구하면 반드시 주시고..

하나님께 있는 그 지혜를 얻기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골치아픈 문제들을 내 재주로 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풀려고 하면..

결과는 언제나 좋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못하는 일이 많아서 꾸중들을 조건이 충분하나..

그래도 기도하면 측은히 여기시고 넘치게 주십니다.(약1:5) 

 

출애굽직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양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르고..

양고기는 구워서 먹고 집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개도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침묵 속에서 그 밤을 지새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피 뿌려진 집은 장자가 죽는 재앙이 지나가버리고..

피 뿌림이 없는 집은..

맏아들과 짐승의 첫 새끼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자기 집 문에 피 뿌렸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근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근심걱정을 합니까?

이웃집에서 곡(哭)소리가 나든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든..

조바심을 낼 것도 없고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질릴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일입니다.

편안하게 앉아 있든지 잠을 자든지 상관없는 일입니다.

중다한 잡족(雜族)도..

이스라엘사람들을 흉내 내어..

자기 집에 피 뿌리고 기다렸더니..

그 집도 역시 재앙이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이 아닌 이방인들마져도..

이스라엘사람들을 흉내 냈어도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따라했더니..

그들도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만 그들을 늘 예의주시하면서 경계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구원을 받기는 하였으나..

불평불만, 원망, 거역, 불순종, 훼방이 모두..

그 잡족들에게서 나왔다는 사실 만큼은 잊지말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항상 문제의 중심에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현재 그 잡족(雜族)들처럼 고약한 모습으로..

하나님 눈에 발견되고 있지는 않습니까?(출12:1-51)

우리가 육신으로는 이방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혹시..

중다한 잡족처럼 신앙을 흉내로 그치는 사람은 없습니까?

[사람보기에는 믿는 것 같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올시다]라고 한다면..

그사람은 불쌍한 인간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의 삶의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흔들릴 수도 있고..

때로는 환경의 조건의 압박에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떠는 나약함을 보일수도 있습니다.

사람사는 환경이 아무리 고약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과 함께하시고 매순간마다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신앙을 버릴수 없는 것은..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850대1이라는 절대적인 숫적 열세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우상의 신관들 850명을 처치해버리고 위세를 떨쳤으나..

왕비 이세벨의 [살해하겠다]는 협박에..

몸을 떨며 정처없이 도피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한두 번은 믿음으로 굳게 설수 있었으나..

곧 권력자들의 살해위협에 기가 질려서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더러 양 (羊)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앞을 내다보는 안목은 없고..

오직 후각과 청각에 의해서..

앞서가는 경험자의 발자취를 따라갈 뿐..

스스로 난관을 타개해나갈 능력은 없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만 안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함과..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면..

양의 삶은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하나님이 누구이며..

나와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면..

저절로 되는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근심이 안 되는 것이고..

걱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걱정하고 있다면 믿음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