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죄만 정죄하고 처벌합니다.
마음에 품은 죄, 숨겨진 죄는 처벌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마음에 감추어진 죄까지 표출시켜서 통회하게 하십니다.
율법이 햇빛처럼 자기를 비추면 죄를 자백하지 아니할 자가 없고..
죄를 자백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죄의 대가를 치루지 못하면..
그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반드시 죄의 값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율법아래서는 짐승이 죄인의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의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율법아래서 죄를 깨닫고 자백하면 반드시 속죄제를 통하여 일시적인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향하여 자세를 바로잡고 행실을 돌이킵니다.
복음 안에서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도 전에..
이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 한번의 속죄제사로 영원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통회 자복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이미 주신 복락을 빼앗기지 않는 방편입니다.
나도 모르는 틈에 내가 죄인으로 생겨났고 그가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그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거절할 때 지옥형벌이 그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마귀의 참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자복하면 그만입니다.
율법적 사고(思考)를 갖고 있는 선생들마다 통회, 자복, 회개로써..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복음적 사고로는 통회, 자복, 회개가 죄의 사멸과 구원의 전제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통회, 자복, 회개의 목적은..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을 향한 원수마귀의 참소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낳으셨다’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믿는 믿음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마음에 통회가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복음으로는 사람의 마음에 통회가 간단히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을 만지심으로서 마음의 통회가 이뤄집니다.
인간이 육신의 때 죄에 대하여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로 여전히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과 복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원수에게 당하지 않도록 통회, 자복, 회개를 이루게 하십니다.
통회, 자복, 회개는 하나님 앞에 매우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통회는 마음에 할례를 받는 모습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자연스레 귀에도 할례를 받게 됩니다.
통회는 육체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마5:4)
사람의 죄를 보고 마음이 찢어질 만큼 통증을 느낄 자가 예수 말고는 없습니다.
사람의 죄로 인하여서 당신의 육체가 찢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니까 사람이 그와 함께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식을 습득함으로서 통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고행 적 기도를 통해서 통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회, 자복, 회개를 두루뭉술하게 묶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만..
통회는 성령의 만지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그 말씀을 깊이 인정하고 복종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생겨났다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인정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연약한 존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율법아래에서 죄악을 자복하면 어떤 경우는 자신이 처벌을 받았고..
어떤 경우는 짐승이 대신 죽었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사람이 자기의 죄악을 자복하면 원수가 훼방할 근거를 없애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한다며 울고불고 통곡과 넋두리를 쏟아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통회의 모습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회개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눈에 그러한 모습을 보였어도..
얼마 못가서 자기가 하던 짓을 다시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절벽 끝을 향하여 나아가던 행로를 바꾸어..
안전한 길로 방향전환을 하는 행위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잘못된 길인 줄 몰랐던 사람이..
자기 가는 그 길의 결과가 최악으로 나타날 것을 확인한 순간..
지체 없이 방향수정을 해버린 것이 회개입니다.
벼랑을 향하여 곧장 나아가면서 방향은 바꾸지 아니하고 통곡만 쏟아내고 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됩니까?
뾰족뾰족한 대나무 창이 곧추 서있는 깊은 함정에 빠지기 직전인데..
몸은 돌이키지 않으면서 비탄에 빠져 신세한탄을 쏟아내며..
여전히 함정을 향하여 걷고 있다면..
그것은 통회도 아니고, 자복도 아니고, 회개도 아니고, 어리석은 짐승과 같습니다.
회개란 자기의 가는 그 길이 잘못된 길임을 깨닫고 순간 몸을 돌이키는 모습입니다.
죄란 과녁을 벗어난 화살을 뜻합니다.
회개란 활시위의 조준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세를 수정하는 궁사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가 중요한 이유는..
험난한 육신의 때를 살아가면서..
시시때때로 예수께 있는 생명과 복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복을 공급받아야 힘을 얻고 어려운 때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 통회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면서..
그것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우리 주님의 고통이었음을 알게 되고..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서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자복이 중요한 이유는..
자복이 원수마귀의 참소를 무기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생활을 하면서 육신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회개가 중요한 이유는..
순간순간 육신이 왕 노릇 하려는 이때에..
자칫하면, 주님이 피 흘려 만드신 이 십자가의 길을 벗어나서..
성도로서 마땅치 않는 길로 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만든 길은 그것이 아무리 멋있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닿지는 않습니다.(고전1:18)
오직 우리 주님이 그 몸을 찢어 피를 흘리심으로 만드신 십자가의 길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길,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그 길로 다시 접어드는 것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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